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일부 돌아왔다. 포로의 귀환 방법은 크게 세가지다. ① 자력으로 탈출해 귀국한 경우 ② 조선의 사절단의 요구로 데려온 경우 ③ 쓰시마의 소(宗)씨들이 중매에 나선 경우 등이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재개는 광해군 2년(1609년)에 이뤄졌는데, 그 이전에 귀환자는 대개가 자력으로 탈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탈출 수단으로 사용한 배는 다양한 형태로 조달되었다. 훔치거나, 빼앗고, 빌리고, 구입하고,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도망가다가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강황의 ‘간양록’에 전라좌병영의 이엽(李曄)이 도망가다 발견되어 자결했는데, 왜.놈들이 시체를 건져 ‘환괘의 형’에 처했다는 대목이 있다. 환괘의 형이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다이묘의 허락을 받아 귀국하는 경우도 다른 영지에서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과 외교가 재개된 이후에 공식적인 쇄환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가 피로인들을 데리고 왔다. 일본 전역에 분견사를 파견해 조선 정부의 분견사를 보내 포로 조선인들을 확인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고 연락이 단절된 곳이 많아 사절단의 소식이 전달된 곳이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643년까지 다섯차례 파견되었고, 이중 쇄환사라는 직책이 파견된 것은 1607, 1617, 1624년 세차례다.
그러면 귀환한 피로인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조선의 사료에는 피로인의 귀환을 기록한 기사는 많지만, 그들의 대우에 관한 언급은 의외로 적다.
1605년 사명대사((惟政)가 이끄는 사절단이 1,391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귀국해 부산에 도착했을 때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경담이라는 사람이 쓴 「난중잡록」이다.
유정은 쇄환한 피로인을 이경준에게 맡기고 형편대로 나누어 보내도록 했다. 이경준은 휘하의 선단에 명하여 사후처리를 위임했다. 선장들은 피로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맡자 우리가 보는 앞에서 포박했다. 그 모습은 약탈보다도 더 심했다. 신원을 물어 대답하지 못하는 피로인도 있었는데, 어려서 잡혀가 출신지가 조선이라는 것만 알뿐 자기의 족보나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자도 많았다. 선장들은 그들을 모두 노비로 삼았다. 피로인이 미인이면 그 남편을 묶은채 바다에 던져 그 여자를 자기의 것으로 삼았다. 이러한 소행은 결고 한두 예로 그치지 않았다.
이런 나라도 있나. 숱한 고생을 하다고 조국이라고 찾아왔는데, 남자는 노비로 삼고, 여자는 첩으로 삼다니….
1607년에는 1,418명의 피로인을 데려와 민간에 분산배치하고 관리들은 그냥 가버렸다. 1617년에는 귀환한 321명을 부산에 내려놓고 마중오기로 한 관리가 나타나지 않아 모두 끼니를 걸렀다고 한다.
이런 소식이 일본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피로인들에게도 알려진 것 같다. 쇄환 사절단이 가서 돌아오라고 종용하면 그들 중 일부는 “조선은 피로인을 쇄환해도 대우가 형편없다고 합니다. 저들이 포로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닙니다. 쇄환시키고도 그렇게 냉대합니까”라고 힐문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일본인 학자 요네타니 히토시는 이렇게 분석한다.
첫째, 조선의 본국 사대부들은 일본에 포로로 잡힌 조선인이 적군에 협력한 사람들이 아닐까, 자발적으로 적군을 따라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력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인정하지만, 쇄환사절단을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둘째, 조선 정부가 쇄환정책을 취한 것은 국가의 체면에 관계되는 명분론에 치우쳤다는 점이다. 결코 포로가 된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겨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국인을 데리고 와 부산까지 실어나르면 끝이고, 그 다음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방치했다. 전형적인 사대부 계급주의의 발상이 빚어낸 결과다.
출처 : 오피니언뉴스(http://www.opinionnews.co.kr)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처리 좇같이 하는건 여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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