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중국은 6.25 전쟁을 어떻게 손절하게 되었는가?
본문
중공군은 1950년 두 차례의 공세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의 뽕맛을 못 잊고 1951년 상반기 내내 38도선 이남으로 무한 트라이 함. 그러나 공략법 찾은 유엔군에게 아주 제대로 줘팸당하자 ㅈㅈ치고 협상장에 나옴.
< 중공군 3차 공세 >
1950년 12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향후 몇 개월은 병력과 장비를 보충하고 이듬해 2~3월에 차기 공세를 펴야된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중공군은 유엔군을 물리치고 전선을 다시 38도선까지 몰아붙였지만 그간의 공세 작전들을 수행하며 입은 손실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9병단(야전군)은 15만 명 중에서 5~6만 명 가량이 죽거나 부상을 입은 탓에 병단 전체가 전선에서 이탈해 있었고, 미 공군의 후방 폭격이 북한의 모든 건물을 파괴하려 들 정도로 극심해지면서 병참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전쟁 목표를 북한 방어에서 한반도 공산화로 확대하였으므로 펑더화이의 재정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속히 38도선 이남으로 전과를 확대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해 12월 14일 서방 측이 제안한 휴전 결의안은 공산 측 반대로 무산되었다.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는 한반도의 38도선은 무력화되었음을 선언했다.
이렇게 조기 공세가 결정되었다. 공세 목표는 국군 사단들을 대거 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북한군 10사단을 비롯한 게릴라 부대가 중부전선을 돌파, 경부축선의 유엔군 병참선을 차단키로 했다.
1951년 1월 1일을 전후로 시작되어 신정 공세라 불리기도 하는 이 전역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이하 공산군)은 유엔군을 37도선까지 밀어내고 서울을 재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허나 전과 달리 유엔군은 무질서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월튼 워커를 대신해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축차방어선을 설정하고 유엔군을 계획적으로 철수시켰다.
유엔군은 공산군이 힘이 빠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동안 중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이 원주를 점령하고, 북한군 2개 군단이 유엔군 후방으로 침입하는 위기가 전개됐으나 사투 끝에 유엔군이 이들을 물리치고 전선을 안정화시켰다.
펑더화이는 여기까지가 한계라 보고 과감히 공세를 접었다.
1월 8일 공산군에게 추격 중단 및 휴식 명령이 하달됐다.
서부전선의 공산군은 1개 사단만 한강 이남에 잔류시키고 주력을 38도선으로 복귀하여 접적마저 끊어버렸다.
펑더화이의 결정은 신장된 병참선에 비해 빈약한 보급수송능력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현실과 자칫 측후방으로 유엔군이 상륙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물론 올해 안으로 전쟁을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한 김일성이나 남한 지역에 정치적 기반이 있는 박헌영이 펑더화이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고, 소련 주북 군사고문단장이자 주북 대사였던 라주바예프도 비판에 가세했다.
논란은 중소 양국의 총참모장들이 논쟁을 벌이고 스탈린이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펑더화이는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고 두 달의 휴식을 위해 자신의 직위까지 걸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협의 끝에 펑더화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공산 측은 늦은 겨울잠에 들어갈 것 같았지만 펑더화이의 구상을 바라보는 이는 남쪽에도 있었다.
유엔군은 공산군에게 숨 돌릴 틈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 중공군 4차 공세 >
유엔군은 공산군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전면 반격에 나섰다.
1월 25일부터 서부전선에서 썬더볼트 작전이 개시됐고, 중동부전선에선 라운드 업 작전이 개시됐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이 한 달 동안 공세를 준비하고 8일 가량 작전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전지속능력, 정확히는 병참 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3차 공세의 힘을 빼놓는 데 성공한 그는 공산군에게 휴식과 재정비의 기회를 주지 않는 즉각적인 반격을 결정했다.
펑더화이로선 의표가 정확히 찔린 셈이었으나 노련하게 반격 계획을 수립했다.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진격을 최대한 저지시키는 한편, 중부전선에서 돌파구를 내 서부전선의 유엔군 측후방으로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공세 때 안동으로 침투한 북한군 10사단과의 연결을 통해 경부축선을 교란시키는 것 역시 목표 중 하나였다.
이때 펑더화이의 중공군 수뇌부는 돌파구를 어디서 뚫어야 할지 고민하였는데 라운드 업 작전으로 전선이 돌출된 지평리의 미군과, 횡성의 국군이 죽음의 이지선다에 놓여 있었다. 펑더화이는 횡성을 골랐다.
중공군은 세 차례의 공세 작전으로 피해가 누적된 13병단을 후방으로 빼고 대신 새로 증원된 3, 19병단을 출전시켰다.
수 만 명의 고참병들도 추가로 배치되었다.
공세가 시작되자 중공군은 횡성에서 국군 8사단을 유인 및 종심기동으로 농락하며 포위섬멸시켰다.
국군 5사단도 적잖은 피해를 입고 밀려났다. 하지만 횡성 방면의 돌파구는 지평리와 원주에서 각각 가로막혔다.
특히 지평리의 미 2사단 23연대전투단은 중공군 4개 사단에게 포위되었음에도 사주방어와 막강한 화력지원을 바탕으로 중공군의 4차 공세를 아예 분쇄시켰다.
급작스레 기획된 공세라 공격 목표가 여러차례 바뀐 탓에 중공군 각 전술제대들은 명령을 수령하고 작전계획을 세울 시간이 부족했고, 지평리 전투에서 그들은 협조되지 않고 비효율적인 공격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의 공군력이 공산군의 병참 능력을 약화시킨 것 역시 공세 실패에 한몫했다.
한계가 명확해지자 펑더화이는 일주일만에 공세 작전을 종료하고 방어로 방침을 전환했다.
경북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북한군 10사단은 소수의 병력만 남기고 섬멸되었다.
유엔군은 이번에도 공산군에게 휴식과 재정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신속히 재반격에 나섰다.
그 결과, 유엔군은 썬더볼트 작전을 완수하였으며 3월에는 서울을 재수복하고 전선을 38도선 가까이 끌어올릴 수 있었다.
< 중공군 5차 (4월) 공세 / 춘계 1차 공세 >
이제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중국의 전쟁 목표는 한반도 공산화에서 다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걸로 되돌아갔으며 협상을 통한 전쟁 종결을 추구하게 되었다.
대신 중공군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유엔군의 유생역량을 최대한 파괴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중국은 펑더화이가 요구한 대로 두 달 동안 전국의 주도권을 내주더라도 휴식을 취하며 병력과 장비를 증강하였다.
1, 2차 공세에선 동원되지 못했던 기갑과 포병도 소련제 장비를 원조받아 배치했다.
북한군도 전력 재건을 통해 18개 사단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 밖에도 공산군은 폭격으로 파괴된 후방 교통망을 복구하고 유엔군 상륙에 대비해 후방 지역에 병력을 따로 배치하였다.
물론 병참의 모든 것들이 미 공군의 폭격에 박살이 나고 있고 물자는 태부족이라 대공세를 받쳐주기에 한참은 모자랐으나 공산군은 결정적 승리를 위해 부던히 준비했다.
이 공세에서 중공군은 그들 장기인 돌파와 침습, 우회, 포위를 최대한 발전시켜 작전술에 반영했다.
공산군은 중부전선을 돌파, 전선을 동서로 분할시킨 뒤 우회 포위기동으로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포위섬멸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와이오밍선 점령을 위해 공격하다 생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중부전선의 유엔군이 돌출된 형태로 있게 되면서 방어선의 종심은 얕아지고 상호지원이 횡적으로만 가능함을 간파한 것이었다.
그는 서부와 중서부전선에 밀집된 미군 사단들을 잡아삼키기 위해 서부전선 전체에 중공군 3개 병단을 투입하는 강수를 두었다.
전력비는 1:4를 넘었으며, 그마저도 임진강 방면의 국군 1사단과 영연방 29여단은 중공군 1개 병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상대해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이쪽의 전력비는 최대 1:10까지 벌어져 있었다.
이제 서부전선의 공산군의 모든 힘이 집중되었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위해 노동절까지 서울을 점령하겠노라 선언했다.
최대의 위기가 도래한 순간, 유엔군사령관으로 승진한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미 8군사령관에 막 취임한 제임스 밴플리트는 서울 사수를 택했다.
그는 서울 북방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중공군은 사창리에서 국군 6사단은 손쉽게 격파하고 설마리의 영연방군 글로스터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선은 서울 북방 5km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국군 6사단을 대신하여 영연방 27여단이 가평에서 중공군을 3일간 저지하면서 공산군의 전선 분할 기도를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서쪽에선 국군 1사단과 영연방 29여단이 무제한에 가까운 인해전술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치며 중공군의 공세 템포를 억제시켰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전선의 측후방을 침투하지 못하도록 좌우 인접의 아군들과 보조를 맞춰 노네임선으로의 철수와 방어를 반복했다.
유엔군의 화력과 공군력은 중공군의 전후방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중공군의 병참 능력은 빠르게 한계를 드러냈다.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음에도 중공군은 포위섬멸도, 서울 점령도 성공하지 못했다.
펑더화이는 서울을 앞에 두고 공세 실패를 인정하였고 8일만에 공세를 종료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이번 결전을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 중공군 5차 (5월) 공세 / 춘계 2차 공세 >
펑더화이는 종전까지 보인 신중함과 달리 근시일내에 후속 공세를 실시하겠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단 이번에는 서부전선이 아니라 동부전선으로 주공을 지향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우월한 화력을 갖춘 미군에 비하면 약체고 이미 여러차례 깨뜨린 적 있는 국군을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국군은 그동안 양적으로 팽창하였지만 기관총부터 포병까지 화력이 빈약하기 그지없었고, 1년 가까이 전쟁을 치르느라 기존에 양성해놓은 장교단이 소모되고 단기 속성으로 임관한 장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더욱이 한반도 동부는 중공군의 장기 중 하나인 산악전을 펼치기에 최적이었는데 동부전선의 국군 사단들은 사선으로 배치돼 돌출된 형세를 하고 있어 최적의 먹잇감이기까지 했다.
펑더화이는 삼중 포위를 실시하여 국군 사단들을 대거 섬멸하는 것으로 유엔군의 유생역량을 파괴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생각이었다.
공산군은 지난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공세 준비 기간은 고작 12일이었다.
따라서 병사가 휴대한 4~5일치의 탄약, 식량이 작전지속능력의 전부였다. 전술제대들은 작전계획을 세우고 숙의할 시간이 부족하여 공세 초반 엉뚱한 곳으로 공격하거나 아예 길을 잃고 배회하는 실책을 연발하였다.
그러나 작전술적 영역에서 공산군은 자신들의 의도를 은폐하는 걸 어느정도 성공했다.
유엔군사령부와 미 8군은 항공 정찰로 대규모의 공산군이 동부전선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파악했음에도 한동안 그것을 적의 기만으로 여기며 공산군은 여전히 서부전선을 노린다고 오판하였다.
유엔군은 공세 일주일 전에서야 펑더화이의 노림수를 깨달았지만 방어 계획을 수정할 시간은 없었고, 예비대를 중부전선에 배치하는 선에서 대응하였다.
그 결과 중공군 주력을 맞닥뜨린 국군 7사단은 1개 대대당 1개 사단씩 상대하는 경악스런 운명과 마주하게 되었다.
가열찬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는 국군 5, 7사단의 방어선을 말 그대로 짓뭉개버리고 국군 3군단을 단 하루만에 포위망에 가두는 성과를 올렸다.
게다가 현리에서 집결한 국군 3군단이 어처구니 없이 붕괴되면서 돌파구는 하진부지까지 확대되었다. 밴플리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전황이 빠르게 악화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황을 반전시키지 못할 것까지는 아니었다.
본래 중공군은 3차에 걸쳐 양익포위를 전개할 계획이었으나 우익의 북한군 2, 5군단이 국군 1군단의 지연전과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지 못해 포위망을 전개하는 데 실패했다.
중공군의 1, 2차 포위망도 불완전한 형태에 불과했으며 3차 포위망의 경우 중공군이 유엔군과 국군의 배치를 오판하는 바람에 훨씬 강력한 미 2사단을 상대로 공격을 펼치다 역시 실패했다.
이렇게 포위가 불완전하였기에 국군 3군단의 패잔병들은 포위망이 형성되지 않은 지점을 찾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밴플리트는 굳은 심지로 축차진지상으로의 후퇴 전략 대신 현 위치에서 공산군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유엔군은 침착하고 재빠르게 위기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후방에서 100km를 급행한 미 3사단이 가까스로 부대를 수습한 국군 5, 7사단과 함께 돌파구 첨단(정면)을 봉쇄했다.
돌파구의 우측 견부에선 국군 1군단이 공산군을 상대로 철벽같이 수비하며 대관령을 확보했으며, 반대쪽의 홍천-인제 축선은 미 2사단이 돌파구의 확장을 저지하며 5월 공세 자체를 돈좌시켰다.
중공군은 미 2사단을 상대로 집착 수준으로 공격을 반복하다 결정적 승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중 미 2사단 38연대는 일일 탄약의 통제보급율을 5배로 늘리는, 이른바 밴플리트 탄약량을 사용하고 진내사격까지 감수해가며 벙커고지를 사수해 전사에 인상적인 활약을 남겼다.
한편,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동부전선으로 증원되지 못하도록 실시된 중공군 63군(군단)의 조공은 용문산에서 국군 6사단에게 대패하는 것으로 그 의도가 무산되었다.
병참의 문제는 어김없이 재발했다.
중공군은 휴대한 식량과 탄약을 모두 소모해버리자 재보급을 위해 3일 동안 공격을 중단하여야 했으며 일부 부대는 철수하기도 했다.
압도적이었던 초전의 충격력과 달리 그들에겐 전과확대를 위한 능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돌파구 첨단의 미 3사단이 역습에 나서면서 중공군 지휘부는 다가올 재앙을 감지하였다.
공세 개시 5일만에 펑더화이는 더이상 승산이 없음을 인정하고 공세를 중지하기로 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유엔군은 중공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는 판단 하에 곧바로 동부전선 전체에 반격을 지시했다.
이번 반격은 인접 우군 부대와의 연결을 중시했던 이전과 달리 기갑과 보병으로 구성된 특수임무부대가 수행하는 기동전이 구사됐고, 반격의 템포는 한층 더 빨라졌다.
사방에서 퇴로를 옥죄여오는 가운데 중공군은 돌파구 안에 갇히기 전에 하루빨리 후퇴를 단행하여야만 했다.
철수 과정에서 중공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후퇴하던 중에 미 공군의 폭격에 녹아내리기 일쑤였고, 패잔병들은 파로호를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
주력을 살리기 위해 돌파구 안으로 투입된 중공군 예비대들은 후미를 맡아 격전을 치렀다.
중공군 180사단은 국군 6사단과 미 9군단의 포위전에 섬멸되었고 300명만이 생환하였다.
그들 입장에선 이 피해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었다.
만일 펑더화이가 공세 중단을 늦췄거나, 중공군의 퇴로였던 화천이 조기에 점령되었다면 중공군은 2개 병단 전체가 돌파구에 갇혔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사상자는 중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8만 5천 명이 아닌, 십수 만을 훌쩍 뛰어넘었을 것이다.
유엔군의 반격은 전선을 38도선으로 쭉 끌어올리는 결과로 이어졌고, 나아가 1951년 하계 공세와 추계 공세의 발판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국이 전쟁수행의지가 완전히 꺾였다는 점에서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마오쩌둥은 이제 협상을 통한 전쟁의 종결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주도권을 쥐기 위해선 추가 공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으나 공산군의 방침은 방어로 굳어졌다.
그 해 6월에 주유엔 소련 대사 말리크가 미국의 휴전 제안을 받아들여 협상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전쟁은 길고 긴 고지전으로 국면이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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