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일본군은 왜 명량해전을 피하지 않았을까? 의문과 답
본문
명량해전
한산도, 노량과 더불어 이순신의 전투 중에서 유명하기로는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전투일 겁니다.
소수의 함선으로 다수의 함선들을 상대해 이겨낸 전과가 대단하죠.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냥 저 정도로 압도적이면, 반반 나눠서 우회한 다음 포위하면 되는거 아니야?'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 글은 그런 의문에 대한 설명이 될 겁니다.
1. 명량해전의 배경
조선 수군은 1597년 8월 27일에 칠천량 해전에서 13척을 제외하고 전멸함.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 이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복귀하게 되었는데,
1597년 10월 8일, 곧바로 어란포 해전을 치루며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였고,
(왜선 8척 격퇴, 이순신 복귀 및 존재감 표출)
열흘 뒤인 1597년 10월 17일에는 벽파진에서 왜선 55척 (호위 전선 13척)을 격퇴시켰음.
(조선 수군의 총 함선 수 13척, 이순신 복귀 재차 확인)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총 함선 수가 확실히 13척 뿐이며,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음.
2. 이순신의 함정
1597년 9월 13일, (이순신이 교유서를 받은 시점, 양력 기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한 이후 난중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월 6일,
어란 바다에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임준영이 말을 타고 와서 급히 보고하는 데, "적선이 이진에 이르렀다."고 했다.
10월 8일,
새벽 여섯시 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 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 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적선이 멀리 도망하기에 더 뒤쫓지 않았다. 뒤따르는 배는 쉰여 척이라고 했다. 저녁에 진을 장도로 옮겼다.
(어란포 해전)
10월 9일,
아침에 건너왔다. 벽파진에 대었다.
10월 10일,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10월 13일,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뿌렸다. 밤에는 된바람이 불었다.
10월 14일,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배가 가만히 있지 못 해서 각 배들을 겨우 보전했다. 천행이다.
10월 15일,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각 배를 서로 보전할 수가 없었다.
10월 16일,
바람은 조금 자는 듯 했으나, 물결은 가라앉지 않았다.
10월 17일,
맑다.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쉰다섯 척 가운데 열세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각 배들에 엄중히 일러 경계하였다. 오후 네 시 쯤에 적선 열세 척이 곧장 진치고 있는 곳으로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 공격하여 급히 나아가니,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 쫓아 먼 바다에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흘러 항해 할 수가 없어 복병선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더 쫓아가지 않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이 날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며 말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아, 여러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라고 재삼 타일러 분명히 하고서 헤어졌다. 밤 열 시 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으로 공격해 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진동했다. 그랬더니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 하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났다 하면서 포를 쏘아댔다. 밤 한 시가 되니 아주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다.
(벽파진 해전)
10월 18일,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10월 19일,
저녁 나절에 적선 두 척이 어란포에서 바로 감보도로 들어와 우리 배가 많은 지, 적은 지를 정탐했다.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따라 갔더니, 적들은 어리둥절하여 배에 실었던 물건을 몽땅 바다 가운데로 던져버리고 달아났다.
10월 20일,
적선들이 멀리 달아났다.
10월 21일,
흐리고 비가 올 것 같다.
10월 22일,
종일 비가 뿌렸다.
10월 23일,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배가 가만 있지를 못 했다.
10월 24일,
벽파정 맞은 편에서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어 싣고 오니 바로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와서 말하기를,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전하는데, 이 달 6일에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이, '조선 수군 열 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 하겠다. 극히 통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조리 죽인 뒤에 한강으로 올라 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 가라고 하였다.
(일본 수군이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으며, 조선 수군의 총 함선 수를 파악했음.)
10월 25일,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울돌목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너그럽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조선 수군이 이 날 진을 옮겼음과, 그 이유가 울돌목에 있으며, 그를 지키기 위함임을 명확히 밝힘.)
10월 26일,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돌목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 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건만 여러 배들은 관망만 하고 진군하지 않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 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 지 한 가진들 알 수가 없었다. 배마다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중략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 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 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명량해전 당일의 기록)
지속적으로 주변을 정탐하며 진의 위치를 옮기고 적 함정들을 격퇴하는 것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한편,
자신의 복귀 사실과 조선 수군 함선의 총 수가 일본 수군에 노출되자 최종적으로 울돌목으로 위치를 옮기었고,
울돌목에 위치한 것이 조선 수군의 수가 적은 것과,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음이 이유라 밝히었고, 울돌목에서 교전할 것임을 확실히 함.
울돌목에서 명량해전이 일어난 것은 철저히 유도된 것임이 기록으로 확인이 됨.
3. 일본 수군의 수가 30배 가량 많은데, 일부가 우회하여 울돌목의 양 측에서 조선 수군을 포위 섬멸할 수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
불가한 이유는 크게 세가지인데.
첫째로는,
조선 수군을 완전히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일본 수군을 그토록 괴롭혀온 적장, 이순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천금같은 순간이었기 때문.
숫적으로도 10배 이상 압도하고 있고, 최소가 조선 수군 전멸, 최대가 이순신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군공을 세울 수 있는 상황에 이걸 포기할 장수는 없음.
둘째로는,
물리적으로 우회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 때문.
정확히는 일본 수군이 조선에서 3번째로 큰 섬(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도 순)인 진도를 우회하는 동안 조선 수군은 후퇴하여 진을 옮기면 그만.
일본의 선박 설계 기술자가 계산한 바로는, 세키부네는 약 5.5노트(시속 10.2km)로 추정되는데,
(https://fujinkoron.jp/articles/-/8336?page=5)
송평항에서 출발하여 진도를 우회할 시, 단순하게 거리를 측정해도 약 75km의 항해 거리가 나오므로, 하루를 꼬박 항해하여야 함을 알 수 있음.
만약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뜻대로 울돌목에서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우회하여 포위 섬멸하는 것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아예 교전 자체를 회피하고 우회하여 조선 수군 본영을 노린다면, 그 동안 조선 수군은 진도 옆에 위치한 수천개의 섬 사이로 진을 숨기고 교전을 회피하면 그만임.
셋째로는,
조선과 일본 수군 간 사거리 차이에 있음.
조선 수군은 주력 함선이 판옥선으로, 함선을 제조하는데 들어간 목재도 단단하며 함선의 규모도 큰 덕에 화포를 여럿 실을 수 있었음.
애초에 판옥선 자체가 함포를 배에 싣기 위해 설계된 함선.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조선 화포들은 위 표에 있고,
명량해전에 직접 사용했다 언급된 지자총통, 현자총통의 사거리는 800보로 960m에 달함.
그렇다면 일본 수군은 어땠을까?
일본 수군의 주력함인 세키부네는 목재가 삼나무인 탓에 배에 함포 다수를 싣기엔 내구도가 굉장히 부족했음.
해서 화포를 배에 많이 실을 수가 없었고, 부족한 화력을 조총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약 50~100m, 살상력을 기대할 수 있는 거리는 150~200m.
조총은 화력도 배를 부수기에는 사실 턱없이 부족했고, 이게 세키부네가 원거리 화력전이 아니라 근접전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
물론, 일본도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세키부네가 대형화된 이후 '석화시'라는 서양에서 전래된 당시 최신형 불랑기포를 사용했는데,
석화시 또한 조선 총통과 비교할 때 앞서 말한 사거리 문제가 극심.
석화시의 사거리는 300m ~ 450m로, 조선 총통의 1/3~1/2에 불과하기 때문.
울돌목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교전할 때에는 언제나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카이팅 당하던 일본 수군에게,
처음으로 '근접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전장'이 제시된 것.
일본 수군 입장에서 이를 피할 이유는 전혀 없었음.
오히려 이 '기회'를 놓칠 경우,
진도 옆의, 섬이 2000개가 넘는 다도해 속에 숨은 조선 수군이 게릴라로 사거리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일방적인 피해를 줄 가능성,
그리고 정유재란 발발과 동시에 단 13척을 제외하고 궤멸해버린 조선 수군에 시간을 줄 경우,
일본 육군이 점령하지 못 한 육지의 자원을 이용해 조선 수군이 재건될 가능성.
두가지 가능성이 일본 수군에게 제시되었고, 어느 쪽도 일본군 입장에선 좋지 않았음.
고로 일본군에겐 진도를 우회한다는 선택지는 고를 필요도, 고를 수도 없는 선택지였음.
4. 애초에 일본 수군 300척 모두를 저 좁은 곳에 몰아넣은 적 없다.
すいえん(水淵)と申す所にはん舟(番船)大しやう(大小)分十三そう(艘)い(居)申し候。大川の瀬よりはや(早)きしほ(潮)のさし引き御ざ(座)候所の内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潮のやわらぎ)申し候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舟居)申し候。 それを見附け、是非ともとり申すべきよし、舟手衆と御相談にて、則ち御取懸り成され候。 大舟(安宅船)にてハいまのせと(瀬戸)をこきくたし(漕ぎ下し)候儀ハ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関船)を御そろへ成され、御かゝり成され候」。(『高山公実録』)
스이엔(수연)이라는 곳은 대소 판옥선이 13척 있었다. 큰 강의 하구에서 빠른 물결이 들고 나다가 잠시 물 흐름이 약해진 사이에 13척이 있던 것이다. 이를 발견하고 반드시 무찌르자고 수군들이 다짐하며 즉각 돌진했다. 대선(아타케부네)로는 이 좁은 물목 사이로 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판단하여 다들 세키부네로 통일해 전투에 임했다. <고산공실록>
일본 수군은 아타케부네가 포함된 330여 척을 몰고 왔으나, 울돌목이 무척 좁으므로 133척의 세키부네만을 동원함.
나머지 200 여 척은 울돌목 밖에서 후진입을 목적으로 대기하고 있었으나,
투입된 133척 중, 완전 침몰이 31척 이상, 침몰은 되지 않았으나 기능을 상실한 세키부네가 92척으로 총합 123척이 궤멸함.
그런데 적 함대는 단 1척도 침몰한 일 없이 건재한 상황.
밖에서 상황을 다 보았을테니 병사들의 사기도 무너졌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 대기 함선들을 추가적으로 투입해봐야 축차투입으로 피해만 누적될 뿐.
흔히 판옥선 1척당 세키부네 3척까지 감당 가능했으리라 보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체급차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2척까지는 능히 상대할 수 있지만, 3척부터는 어려우며, 4척부터는 감당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됨.
명량해전은 330여 척이 몰려온 왜군들이 133척의 세키부네만을 전장에 들여보내게 만들고,
길고 좁은 울둘목을 통과하여 나오는 출구 쪽에서 다시금 직접 맞붙는 전선의 함선 수를 30여 척으로 줄이면서
3:1의 전선을 만들어낸 것이고,
그 와중에 이순신의 함정 단독으로 십수척의 함선을 감당해내면서 왜군의 전선을 붕괴시켜버린 것임.
전선이 붕괴하니 뒤의 배들도 몰살당한 것이고,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적 함선들도 추가 투입될 수 없게 된 것.
요약하면,
1. 명량해전이 울돌목에서 벌어진 것은 철저하게 이순신이 유도한 것.
2. 일본군은 운이 따라주어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고, 그렇다고 육군의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조선 수군에게 시간을 주어선 안 되었음.
3. 일본군에게 유리한(것처럼 보이는) 전장이 제시되었고, 적 수군도 사실상 궤멸한 상태인데다, 이순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
일본군은 명량해전을 안 할 이유가 없었음.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단 한 사람이 깨트린 것.
원문링크 : 개드립 2NAUwU님의 글
https://www.dogdrip.net/?category=22526565&page=1&mid=doc&document_srl=513116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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